마오와 랴오원이(廖文毅·요문의)
2020년 4월 18일.
- 제3 국공합작의 내용이 랴오원이 제거?
오늘 중앙일보의 주말 연재 '사진으로 본 중국현대사'
에서는 1956년 마오쩌둥과 장제스간 '합작'이야기로
지면을 채웠다. 당시 일본에서 대만 독립운동 지지자
들이 ‘대만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토종 대
만인인 랴오원이를 대통령으로 선포한직후에 있었다
는 '제3 국공합작'이야기다.
◀ 랴오원이
장제스나 마오쩌둥은 골수 중국인이었다. 이런 두 사
람 앞에서 어떤 토종 대만인이 (대만의) 독립을 선언
한다면 이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두 사람은 이심전심
으로 랴오를 제거하는데 합의를 한 모양이다. 그래서
랴오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대만
독립운동 추진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1965년에 독립
운동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장제스를 반대하는 지식인들 사이에 3무(무지,
무능, 무위)의 대명사로 지탄을 받던 장제스였지만
대만을 점령한 국민당 군의 힘을 이용할줄은 알았던
모양이다. 결국 군의 힘과 마오의 동의로 대만공화국
은 와해되고 (대만으로 돌아온)랴오는 여생을 감시와
냉대 속에서 시달리다 1986년 생을 마감하게 됐다.
랴오는 내로라하는 대만 명문의 후예였다. 이재에 밝
은 할아버지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훗날 작가가 꿈이었다. 일본
문학에 심취했다. 그런도중 정치학을 전공하던 형이
대륙행을 권했다. 랴오는 형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장제스 정부) 수도 난징의 진링(金陵)대학 기계과를
나와 미국으로 가 미시간대학과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서 화학과 공정학을 전공하고 미국 출신 중국 여인과
결혼 했다.
그 후 랴오는 아내와 함께 (아내가 원하는) 저장(浙江)
성 항저우(杭州)로 가 저장대 공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제당분야 등의 연구에 몰두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
해 철수한 후 그는 국민당 정부의 공무국장에 임명됐다.
중국어와 일본어·영어에 능통한 그는 대만의 지식인
사회에 명망이 있었다. 공직도 원만히 수행했다. 자비
로 ‘대만민족정신진흥회’를 설립해 대만 청년들을 모으
고 ‘대만헌정회’를 조직하며 선봉(先鋒)이라는 잡지도
창간했다. 대만의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다루는 종
합성 잡지였다. 젊은 식자층에 인기가 굉장했다. 그
러나 선거운은 없었다. 나가기만 하면 낙선했다.
1949년 12월, 장제스가 대만을 점령하자 그는 일본으
로 밀항했다. 교토에서 ‘대만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1956년 2월 말 대통령에 취임했다. 태양과 초승달이
들어간 국기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토종 대만인인)
그의 꿈은 결국 (제3차 국공합작으로) 무너지고 그 이
후 대만은 지금까지 독립의 '독'자도 내지못하고 있다.